가장 제주스러운 것을 하자
아침에 눈을 떴다. 아직 휴가인 게 실감 나진 않았다.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고 뭘 해야 하나 생각을 했다. 내가 여행 온 게 맞나? 내가 지금 서귀포인 게 맞는 걸까?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주변 식당은 모르겠고, 우선 배는 채워야 하니 친구에게 추천받은 대도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일요일엔 휴무.. 제주도의 식당들, 특히 도민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곳은 쿨하게 일요일에 쉬는 곳이 많다. 반대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들은 수, 목요일에 쉬는 곳이 많다. 참고하면 좋을듯하다.다시 숙소로 발을 옮기다가 내가 제주도에, 이 서귀포에 왔단 사실을 스스로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가장 제주스러운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연구원님과 얘기 나누었던 올레 7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참고로, 나에게 7코스를 걸어봤다고 말해준 연구원님은 한라산을 등반해 봤는데 둘레길을 걷는 게 한라산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들으면서도 평지를 걷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필시 그때 내렸다던 눈보라 때문일 것이다. 하고 애써 외면했다.
진주식당

올레 7코스는 여행자 인증센터에서 출발한다. 걷다 보면 식당 하나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막연히 걷기 시작했는데 도로변에 진주 식당을 발견했다. 오분자기 뚝배기는 반드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떡하니 도로변에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먹었다. 오랜 시간을 걸어야 되기 때문에 새참 느낌으로 막걸리도 한 병 주문했다. 맛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꽤 유명한 식당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인기가 많이 식었지만)
올레길 (7코스)
막상 올레길을 걷겠다고 했으나 어떻게, 어디서 시작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밥을 먹고 여행자 인증센터로 네이버 맵을 찍고 이동했다. 인증센터의 직원분에게 올레길이 어딘 줄 알고 걸을 수 있냐니까 올레 패스 앱을 추천해 주었는데 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간단히 소개한다.
올레패스는 앱 이름인데, 지도에 걸어야할 경로를 표시해준다. 그리고 패스를 사면 인증해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국토 대장정처럼 인증을 받을 수 있다 (혹은, 아날로그 수첩을 사서 스탬프를 찍어야 하는듯하다)

단순히 지도만 보여주는게 아니라, 어떤 올레길이 있는지 모두 표시가 되고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도 가이드해준다. 위 지도는 실제로 내가 겪은 상황의 화면인데, 넋을 넣고 걷고 있다가 동선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이렇게 되면 올레길에서 멀어졌다고 소리가 나오며 경고해준다. 음악을 듣고 있어도 시스템을 이용한 사운드라 놓칠새 없이 알려준다

그리고 현재 얼마나 걸었고, 얼마나 걸어야 표시된다. 여러모로 잘 만든 앱이다. 올레길 걷는 것에 생각이 있다면, 미리 다운로드해서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앱은 그렇고, 오프라인으로 알 수 있는 표식도 존재했다.

파란색이 정방향, 주황색이 역방향의 표식인데 50~100M 간격으로 이 매듭 끈이 쭉 이어져있다. 내가 지금 제대로 걷고 있나? 싶으면 이 표식을 찾으면 된다. 갈림길이 나와도 대부분 이 표식이 눈에 띄는 곳에 있다.

다른 하나는 화살표 표지판이다. 끈으로 표시된 곳도 있지만 위와 같이 화살표가 나타내주기도 한다. 좀 헷갈렸던 건 화살표가 K처럼 보여서 꼬리 부분이 가야 될 곳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게다가 길게 표시되어 있기도 해서) 그게 아니고 위 사진에서는 <-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냥 화살표인데 디자인인 것이다. 위 내용을 숙지하고,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은 말 그대로 걷기만 하는 거라서, 특별히 할 말은 없다. 계속 걷고 걸었는데, 그중 좋았던 사진을 게재한다.



전날 봤던 천지연 폭포가 멀리서도 보였다

중간중간 말을 형상화한 제주도의 표식도 보인다





둘레길을 걷다가 마주친 무인판매되고 있는 귤. 목도 축일겸 사먹었다. 나중에 이거 사먹었다고 도민에게 말했는데 찐으로 안타까워했다. 왜 귤을 돈주고 사먹냐고 귤나무에 있는거 따먹어도 아무도 모르고, 뭐라하지도 않는다며....

중간에 만난, 섬의 물이 흘러가 바다가 되던 곳

야타세콰이어 길 (수모루였던 것 같다)

돌 뿐이지만 많은이들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진 길




이 길이 원래 없다는건지 모르겠으나 섬에 들어갈 수 있어 보였다. 운이 좋았던걸까

잡티하나 없이 물에 비친 하늘

중간 인증(?) 센터. 열면 스탬프가 들어있다.

사진을 시간대로 쭉 게재했는데, 오후 5시만 넘어도 앞이 안 보여서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걸음을 중단했다. 발이 너무 붓기도 했다. 7코스가 힘들다는 건 단순히 길이 길어서가 아니라, 돌길도 많고 숲길도 많아서 말 그대로 걷기가 힘들다. 추천할 만한 코스냐? 하면 아니다. 너무너무 힘들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적는 지금 와서 적어보면 7길이 참 볼 것도 많고 아름다운 길임엔 틀림없다. 그래서 막연히 비추천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내 생각엔 외돌개까지만 걸으면 완벽한 길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둘레길을 걸으며 든 생각이, 제주에 꽤 여러 번 왔지만 제주라는 곳을 이해하려면 둘레길을 걸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블로그에 다 올리지 못한 아름다운 경관이 많았으며,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닌 여러 항구를 지나치며 제주의 삶을 엿볼 수도 있었다.
누군가 정해준 목표도 없고, 중단하려면 언제든 중단할수 있고, 머물고 싶은곳엔 더 머물 수 있었다.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듣기도 했다. 내겐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고, (다 걷진 못했지만) 여행의 첫날 걷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두가시의 부엌
앞이 안보이는 둘레길을 벗어나 길로 나와서 가까운 식당을 보니 두가시의 부엌이라는 특이한 식당이 있었다. 뭘 파는지 알 수 없어서 네이버 맵을 열어서 보니, 갈치조림을 파는 집이라고 되어있는데 가격이 1인 1만 8천원으로, 2인 이상이니 3만 6천원이었다. 아침에 잠깐 조사해본 모든 식당들의 가격이 갈치조림이 6만원씩했는데 여긴 3만원대에 갈치조림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에 얼른 입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장님께서 저희는 2인분부터 되는데요 라시기에 제주 사람들 매너가 참 좋구나 생각했다. 기꺼이 2인분 먹겠다하고 앉았다. 오히려 흑돼지구이까지 주문해서 낭낭하게 먹었다


담음새도 좋고, 음식들이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느낌이었다. 갈치조림 안에 들어있는 고사리도 맛있었고, 반찬들도 맛있었다. 그런데 좀 어묵이 아쉬운 느낌.. 매우 뛰어난 잔치에 어묵이 뜬금없이 껴있는 느낌이랄까? 굳이 4찬을 위해 억지로 낀 느낌이었다. 전반적인 수준을 떨어트리고 있달까... 다 처먹어놓고 이런 말 하기엔 좀 그렇지만 어묵이 있는 게 흠이라고 생각한다
베스트 아로마
식사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진 길을 보니 버스 타고 돌아갈 엄두가 안 났다. 발도 퉁퉁 부어있어서 제발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택시를 불러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걸었는데 택시로 13분 만에 도착해서 허무함의 극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와서 누워있는데 퉁퉁 부은 발이 신발에서 해방되자마자 엄청나게 붓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한두 시간 정도 편하게 내버려 두면 되겠지 하고 폰을 했는데, 문제는 한두 시간이 지나도 발 부은 것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좆됐음을 느꼈다. 이거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앞으로의 일정에도 영향이 있겠다 싶었다.그때 문득, 숙소에 들어오면서 본 입간판이 생각났다. 지하에 있다는 마사지숍... 멀면 모르겠는데 바로 지하에 있는 거잖아? 그래서 어떤 곳인가 하고 검색을 좀 해봤는데 사장님이 인스타를 하시는데 개업했다고 소문도 내시고 노래도 하시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이건 퇴폐 일수가 없다 싶어서 바로 연락을 하고 마사지를 예약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나 건전한 숍이었고, 사장님에게 2주간 이 숙소에 묵는다고 하니까 그럼 밥집이나 갈 곳 정보가 많이 필요하지 않느냐 말씀하시기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다려보라더니 ....

귤 한 봉지와 밥집을 잔뜩 적어서 건네주셨다. 여행 중에 이 리스트를 상당히 많이 이용했다.. 귤은 자기 밭에서 직접 재배하신 거라고 했다.
나는 이때 제주도 도민들에게 엄청난 친절함을 느꼈다. 심지어 마사지는 또 얼마나 시원하게 해주시던지 (문자 그대로 나를 지근지근 밟기도 함) 내일 나는 걱정이 없다. 무조건 멀쩡한 육신으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리스트와 귤을 받아가지고 숙소로 올라오는데 너무 웃겨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코미디가 있나
서귀포 베스트 아로마, 진짜 추천합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씻고, TV에 크롬 캐스트를 연결해서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었다. 크롬 캐스트는 신이다. 병신 TV도 그냥 최첨단 안드로이드 TV로 바꿔준다. 외장 스피커 같은 걸 챙길 필요가 없다. 크롬 캐스트 4세대는 신이다. 모르겠으면 외우고 구매하도록 해라